사랑은 사람을 변화 시킨다. 안판석 감독의 드라마들
어떤 것에 조예가 깊다거나 무언가에 대해 깊이 있는 덕질을 별로 해 본 기억이 크게 없다. 쉽게 질리고, 관심은 금방 옮겨가는 편이어서 파고드는 사람들에 대한 신기하고 부러운 마음이 있다.
그래도 드라마 보기는 꾸준히 좋아했는데, 드라마를 누가 연출하는지에 대해서 크게 관심이 없으면서도 유일하게 이름을 아는 드라마 연출가가 안판석 감독님이다.
최근작 졸업부터 밀회, 아내의 자격,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풍문으로 들었소, 봄밤까지 다 애정하는 드라마들이다. 감독님의 드라마를 보면, 사랑을 하면서 변화하는 주인공들이 나온다. 변화하는 것은 주로 사회적으로 성공했지만 어딘지 억눌려 있는 여주인공이고, 여주인공의 마음을 녹이는 사랑을 주는 남주인공은 어리면서 순정파거나 신념이 있는 캐릭터로 표현된다.
쓰고나니 왠지 뻔한 전개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촘촘한 서사와 꼼꼼하고 감정선을 섬세하게 따라가는 연출이 설득력을 더해준다. 나의 인생 드라마이기도 한 밀회에서는 유부녀와 청년의 불륜이라는 자극적인 설정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면서, 계속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 같았다. "이래도 이게 그냥 불륜이야?"
극중 재벌 친구의 뒷바라지와 구린 일을 하는 대가로 사회경제적 지위를 확보하고 유능하게 살아가는 오혜원은 낡고 허름한 집에 사는 이선재가 자신의 앉을 자리를 마련해주기 위해 정성 들여 바닥을 닦아주는 모습에 사랑과 존중을 느낀다.
오래된 드라마지만 여전히 세련되고 꿀잼 드라마인 아내의 자격에서도, 어딘지 순박하면서도 시댁과 남편에 눌려 사는 윤서래는 김태오와의 관계를 통해 자기 자신으로 자율적인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인다. 물론 김태오와도 불륜이다.
소재는 어딘지 자극적이고 막장스러운 구석이 있지만, 그래서 더 생각해보게 된다. 정상성의 틀 안에서 잃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삶의 가치란 어디에 있는 것인지... 같은 질문들을 묵직하게 던지는 이 드라마들을 나는 매우 사랑한다. 아 물론, 재미도 있다. 아내의 자격에서 조현태의 불륜이 발각되는 장면과 그 이후의 전개는 왠만한 막장 드라마보다 자극적으로 재미있었다.
그렇다. 사랑은 사람을 변화시킨다. '나'에 대한 감각이란 것은 진공 상태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기에,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나라는 사람에 대한 감각이 생겨난다. 짐짝처럼 대우 받는 사람은 스스로를 짐짝으로 여기고, 도구로 취급 받는 사람은 스스로를 도구 취급하게 되기 쉽다. 하지만 그럼에도 절망할 필요가 없는 것은, 사람은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취약하고 악한 인간은 동시에 강하고 선하기도 하기에 나를 수용하고 존중하며 사랑해주는 상대의 마음은 나를 자라게 하는 자양분이 되어준다.
드라마의 엔딩 후를 상상해본다. 밀회에서 감옥에 수감된 오혜원이 출소한 후에도 이선재와 계속 사랑했을까? 근데 아무래도 상관 없다. 귀하게 대접 받아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기 시작한 혜원의 인생은 전과 다를 것이기에...
덧, 로맨스와는 결이 달라보이는 '협상의 기술'도 궁금하고 기대된다.